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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지린성 퉁거우에 소재하고 있는 광개토대왕비는 고구려 19대 태왕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서기 414년(장수왕 3년)에 아버지의 업적을 찬양하고 추모하기 위해 세운 비석입니다.
이 비석의 내용 중에 신모년조라 불리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신묘년조를 일본 사학계가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활용하면서 우리나라 사학계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당연히 신묘년조는 학계와 세간의 엄청난 관심을 끌 수밖에 없었고 한‧중‧일 학자들이 신묘년조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내놓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신묘년조의 해석에 대해서는 컨센서스(consensus)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각자의 해석과 주장에서 조끔씩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글자를 변조했다는 주장도 다양하게 존재하며, 변조되기 이전 원래 글자를 가정하여 나름대로의 해석을 내놓기도 하지만 작위적이라는 비판은 차치하고라도 그럴 경우 무한히 많은 해석이 등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는 역사에 대한 전문성 제로의 일반인 시각에서 가장 무리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상식적인 논리를 기반으로 신묘년조에 대한 해석을 제안해 보겠습니다.
1. 신묘년조(辛卯年條)의 내용
(A)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B)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百殘□□□羅 以爲臣民. (C)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討伐殘國 |
2. 터무니없는 일본 사학계의 해석
(A) 백잔(백제)과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민(屬民)으로 조공을 해왔다. (B) 그런데 왜(倭)가 신묘년(辛卯年)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 □□ 신라를 파(破)하고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C) 영락(永樂) 6년 병신(丙申)에 왕이 친히 군사(수군)를 이끌고 백잔국(백제)을 토벌하였다.
3. 일본 사학계의 해석이 상식에 어긋나는 이유
위 구절 (A), (B), (C) 간 논리의 흐름이 상식에 어긋납니다. (C)에서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혼내주는데, 그 혼내주는 직접적인 이유는 (B)입니다. 그대로 해석하면, 왜(倭)가 백제와 신라를 쳐서 신민으로 삼았는데, 광개토대왕은 엉뚱하게 백제를 혼내주었다는 뜻이 됩니다.
4. 해석에 대한 새로운 제안
그런데 왜(倭)가 신묘년 이래로 지속적으로 건너 와 바다(해상 및 해안지역)을 쳐부수는 사이에 백제가 동쪽으로 신라를 조금씩 침범해 들어가서 정복 지역을 신민으로 삼았다 |
4-1. 문구별 해석
4-1-1. 『이』(而)
앞 구절의 내용에 비추어, 『그런데』로 해석됩니다.
4-1-2. 『왜이신묘년래』(倭以辛卯年來)
왜(倭)가 주어가 되고 이(以)는 시점을 나타내는 전치사(in)입니다. 그런데 뒤에 나오는 래(來)에 대해서는 해석이 분분합니다. 학자에 따라서는 『왔다』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하고, 이(以)와 연계하여 신묘년 이래(since then)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만약, 『왔다』는 의미로 해석하면, 이 구절은 왜(倭)가 신묘년에 왔다고 해석됩니다. 그런데 이 해석은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습니다.
(1) 래(來)가 뒤에 따라 나오는 도(渡)와 해(海)와 의미상으로 중복된다는 점입니다. 래(來)라는 글자 하나만으로도 바다를 건너서 온다는 의미를 표현하기에 충분합니다. 도(渡)는 바다나 강을 건넌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글자수를 절약하여야 하는 비문에서 동일한 의미의 글자를 redundant 하게 중복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매우 어색합니다. 래(來), 도(渡), 해(海)라는 세 글자를 중복해서 사용했을 리 없습니다.
(2) 래(來)를 『왔다』는 동사로 해석할 경우, 나머지 문구는 신묘년이라는 특정한 한 해에만 왜(倭)가 왔다는 의미가 됩니다(以辛卯年 = in 辛卯年). 그러나 왜(倭)가 신묘년이라는 특정한 한 해에만 왔을 리 없습니다. 만약, 왜가 온 것을 신묘년이라는 특정한 한 해로 국한한다면, 뒤 문구에서 백제가 신라를 정벌하여 신민으로 삼은 것도 특정한 한 해에 일어난 일로 한정됩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백제가 신묘년이라는 특정한 연도에 한 방에 신라를 점령한 적은 없습니다. 아무리 블러핑을 친다고 하더라도 정도가 있지, 아버지의 치적을 기리는 비문에 완벽한 허위 사실을 기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를 고려하면, 『신묘년래(倭以辛卯年來)』는 『신묘년 이래로 지속적으로』(since 신묘년)으로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여기에도 문제는 있습니다. 중국어 문법이나 용례에 이렇게 이(以)와 래(來)를 분리하여 사용하는 경우가 없다고 합니다. 즉, 이(以)와 래(來)를 붙여서 신묘년 이래 (辛卯年 以來)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묘년 이래』로 해석하는 것이 전체적인 글의 흐름에 비추어 타당하다고 생각됩니다. 뒤에도 다시 언급하겠지만,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즉,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혼내주는 것은 신묘년 이후 6년 뒤의 일입니다. 이것을 보면 혼내줄 만한 일이 신묘년에 한 번 일어났다기보다는 그 이후 지속적으로 일어났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즉, 백제가 신묘년에 신라를 몽땅 한 방에 점령하여 신민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조금씩 조금씩 신라의 땅을 침범하여 그 정복지역을 신민으로 삼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왜가 해상지역을 침략하는 일도 신묘년에 한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신묘년 이후에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그러면, 왜 비문에 굳이 신묘년을 기점으로 기록하였을까요? 그것에 대해서는 뒤에서 언급하기로 하겠습니다.
4-1-3. 『도해파백잔□□□라』(渡海破百殘□□□羅)
이 구절이 가장 논란이 많은 구절입니다. 우선 마모된 세 글자 중에서 라(羅) 앞의 글자는 신(新)이 거의 확실합니다. 그 앞의 두 글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며, 그중 첫 글자는 동(東)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여기서는 다음의 두 가지에 대한 해석이 결정적인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1) 도해파渡海破)의 주어가 누구인가?
(2) 파(破)의 목적어가 무엇인가?
먼저, (1) 도해파(渡海破)의 주어가 누구인가와 관련하여, 그 주어가 고구려라는 해석 등 다양한 해석이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것이든 가장 자연스럽게 해석되는 길을 따르는 것이 타당하다고 봅니다. 앞에 나온 주어인 왜(倭)를 굳이 다른 주어로 대체해야 할 이유와 필요가 있는지 의문입니다. 그냥 왜(倭)로 두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왜(倭)가 건너와서(渡) 바다(해상, 해안지역)를 격파하고(海破)』로 해석하면 아무런 무리가 없습니다. 왜가 신묘년 이후 지속적으로 건너와서 (신라의) 해안지역을 격파했다고 해석하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렇게 해석할 경우 도(渡)와 해(海)의 의미상의 중복문제도 자연적으로 해결됩니다.
(2) 파(破)의 목적어와 관련하여, 목적어로 자꾸만 백제와 신라를 들이 대면 문제가 복잡해집니다.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토벌한 이유로서 백제가 저지른 잘못이 (B)에서 나와야 합니다. 즉, (B)에서 반드시 백제가 주어로 한번 등장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渡海破百殘□□□羅』에 나타나는 백잔(百殘)은 무언가의 목적어가 될 여유가 없습니다. 주어가 될 기회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渡海破』는 주어를 왜(倭)로 하는 문장의 끝부분이 되고, 이후의 『百殘□□□羅』의 백잔(百殘)은 새로운 문장을 시작하는 주어로서, 신라를 침범하여 신민으로 삼은 주체가 됩니다. 따라서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 『百殘□□□羅 以爲臣民』의 두 개의 문장으로 분리됩니다.
그러면, 파(破)의 목적어는 무엇일까요? 해(海)와 묶어, 왜(倭)가 (신라의) 바다(해양 및 해안지역)를 쳐부순 행위를 의미한다고 보면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4-1-4. 『이육년병신』(以六年丙申)
신묘년은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해입니다.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토벌하기로 한 것은 즉위 후 6년 만인 영락(永樂) 6년 병신년입니다. 백제를 토벌하기까지 6년을 기다린 이유가 무엇일까요? 신묘년에 백제가 크게 한번 사고를 쳤는데, 그걸 조용히 기억하고 있다가 6년 만에 토벌을 하기로 한 것일까요? 신묘년에 백제가 신라를 몽땅 집어삼켜 신민으로 삼았다면 광개토대왕은 곧바로 출정을 했거나 빠른 시간 내에 서둘러 출정을 했을 것입니다. 신묘년 이후 백제가 지속적으로 조금씩 조금씩 신라 땅을 침범해 들어가서 신민으로 삼는 것을 보다가 드디어 즉위 6년 만에 토벌을 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4-1-5. 『왕궁솔수군토벌잔국』(王躬率水軍討伐殘國)
광개토대왕이 직접 수준을 통솔하여 백제를 토벌하였다는 내용입니다. 수군의 수(水)에 대해서는 이론이 존재하기도 합니다. 왕이 직접 토벌에 나섰다는 것은 그만큼 광개토대왕이 화가 많이 났고 백제 토벌이 중대한 사안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4-2. 광개토대왕은 왜 화가 많이 났을까요?
광개토대왕이 백제에 대해 화가 많이 난 결정적 이유는 무엇일까요? 백제가 광개토대왕 자신을 무시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광개토대왕이 즉위하기 이전까지는 백제가 속민으로서 조공을 바치며 잘 지내오다가 자신이 즉위하는 시점을 틈타 새로운 관계와 지배구조의 변화를 시도하려 했기 때문에 더욱 무시당한 기분을 느꼈을 것입니다. 광개토대왕 입장에서는 기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강력하게 자신의 힘을 보여주어야 할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신묘년을 특정하여 비문에 기술한 것도 그 해가 광개토대왕이 즉위하던 해로서, 백제가 왜와 결탁하여 본격적인 지배구조의 변화를 도모하던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백제가 지배구조의 변화를 시도했다는 것은 비문의 내용만 보아도 명백합니다. 즉, 비문 내용 중 『백잔(百殘)이 의(義)에 복종치 않고 감히 나와 싸우니 왕이 크게 노하여』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그전까지 속국으로 지내던 백제가 고구려의 토벌에 적극 저항하였다는 것이 그러한 의지를 보여줍니다.
광개토대왕의 입장에서는 배신감 같은 것을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속국으로서의 신의를 배신하고 고구려에 저항하였으며, 그것도 하필 자신이 즉위하던 때에 맞추어 그런 시도를 했다는 것이 괘씸하였을 것입니다.
왕이 직접 토벌에 직접 나섰다는 사실과 백제의 58성 700촌을 쳐부수고 백잔주(百殘主)의 아우와 대신 10명을 데리고 돌아갈 정도로 백제를 거의 박살을 냈다는 것은 그만큼 광개토대왕의 분노가 컸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신묘년조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그전까지는 조공도 잘 바치던 애(백제)가 내가 즉위했더니 왜구가 건너와 바다에서 분탕질을 치는 틈을 타 조금씩 신라 땅을 먹어 들어가며 대장 노릇을 하려고 하니 이제는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입니다.
광개토대왕릉비 신묘년조에 대해 여러 전문가들의 견해와 논문들을 두루 살펴보았습니다만 자연스럽지 못한 주장들이 많았습니다. 일반적이고 넓은 길을 제쳐두고 억지로 좁은 길을 찾아 들어가는 주장들이 많다는 점이 다소 놀라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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